우리나라 측량의 역사를 말함에 있어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일제 치하에서의 측량과 지도제작사업이다. 수치스럽고 쓰라린 망국의 한을 담은 과거사의 한 페이지였지만 근대적인 측량기술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1910년 치욕적인 한일합병과 더불어 조선토지조사사업이라고 하는 측량 및 지도제작에 대한 사업이 시작되었다. 조선 총독부 산하에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약 7000여명의 인원으로 8년 8개월에 걸쳐 시행되었으며 토지의 소유권 조사, 토지의 가격조사, 토지의 형태 조사 등 크게 세 부분으로 시행되었다. 삼각측량, 도근측량, 일필지측량, 면적측량, 제도, 이동지측량, 지형측량 7종이었다.

사업착수 다음 해인 1911년부터는 일본 육지측량부의 기술자, 군인들이 다수 투입되었으며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총 8년간의 짧은 기간동안 기선, 삼각, 수준, 세부측량 등 모든 측량을 실시하여 총 220,762제곱킬로미터의 측량을 완료하였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는 우리나라 전역의 1:50,000 지형도가 완성되었다. 일본은 조선총독부의 대 삼각점 성과를 이용하여 동경 원점에 한반도를 연결하였으며 현재 우리나라 국토지리정보원에서 관리 보존하고 있는 것도 그 때의 것이다.

미 극동군 사령부의 극동측지부로 하여금 1954년까지 우리나라 전역의 1:50,000 지형도를 항공사진측량 방법으로 완료하였다.

1957년 8월 국방부 지리연구소가 창설되어 국가의 측지업무를 전담하다가 1961년 2월 내무부 산하 기관으로 창설된 국립건설연구소로 이관되었다.

1962년 6월 건설부로 이관된 국립건설연구소를 중심으로 네덜란드와 협동으로 항공사진측량사업으로 1:250,000 지도를 완성하였다.
(네덜란드 기술진에 의하여 기술자를 양성하고 항공사진측량장비를 확보하며 항공사진측량방법에 의한 지도제작 기법 및 경험을 습득 측량의 현대화를 향한 도약의 계기가 됨)

6.25 동란으로 망실, 파괴된 삼각점 및 수준점을 정비하였으며 1963년에는 인천에 수준원점을 설치하여 수준측량의 기준으로 삼아오며 1970년 5월 서울 남산에서 천문측량을 실시함

1974년 11월 측지기능 강화를 위하여 국립지리원이 창설되어 우리나라 측량과 지도제작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여 계획, 집행하며 측량에 관한 모든 기준을 설정하기도 한다.

1974년부터 1:5,000 대축척 지도제작에 착수하였으며 각종 삼각점 및 수준점의 복구 및 재설작업 꾸준히 계속하고 있으며 측량의 기준에 관계되는 지구형상의 결정, 중력과 지자기의 분포, 지각구조의 연구에 필요한 물리적 자료를 정비할 목적으로 중력 및 지자기 측량도 실시하고 있다.

1981년부터 1985년 사이에는 천문측량에 의하여 우리나라 경, 위도 원점을 설치하였으며 1987년에는 과거 10여년간 측정된 우리나라 1등 2등 수준망을 동시에 조정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삼변측량의 기법과 인공위성 측량기수을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으며 특히 국가좌표계를 세계측지계에 따르도록 측량법이 개정됨에 따라 VLBI(초장기선간섭계), GPS측량 등으로 우리나라의 경위도 원점을 새롭게 결정하여 국립지리원 구내에 설치하였다.

현재까지 1:5,000 수치지도 및 1:1,000 수치지도 등 대축척 수치지도가 제작되고 있다.

2003년 7월 26일부로 국토지리정보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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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액션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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